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냐싱베 에야데마 (문단 편집) === 대통령에 오르다 === 이후 [[1967년]] 4월 14일에는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자신이 추대한 그루니츠키를 몰아낸 후 프랑스로 추방시키고는[* 이후 그루니츠키는 [[코트디부아르]]에서 교통사고를 당했고, 이 부상의 후유증으로 1969년 9월 27일에 향년 5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동년 4월 15일에 대통령, 정부 수반, 국방부 장관에 등극하며 [[정권]]을 장악, 5월 15일에 모든 정당을 해산했고,[* 참고로 집권 초에 에야데마는 초졸이었다는 것을 감안하지 않아도 행정 경험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의 아프리카 수석 고문 자크 포카트(Jacques Foccart, 1913~1997)에게 [[전화]]를 해가면서 토고를 통치해야 했고, 이 때문에 포카트는 '전화로 토고를 통치한다'라는 말까지 들을 정도였다고 한다. [[https://www.theguardian.com/news/2005/feb/07/guardianobituaries|#]]] [[1969년]]에는 나라의 유일한 합법 정당인 토고 인민 집회(RPT)를 만들고 [[1972년]] 1월 9일에 99.9%의 찬성표로 찬성된[* 투표율도 98.6%에 달했다.] 국민투표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된 뒤 [[1979년]]과 [[1986년]]에 단독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서 대통령에 재선했다. 물론 이 선거들은 다 반대표가 거의 없는 [[부정선거]]였으며,[* 1979년 12월 30일 선거는 투표율이 99.45%에 달한 것은 물론 1,296,851명의 투표자 중 무효/공백표를 낸 단 267명을 제외하고는 전부 찬성표를 던져 찬성율이 무려 '''99.98%'''였고, 1986년 12월 21일 선거 역시 투표율은 98.93%에 달한 데다가 1,738,611명의 투표자 중 840명이 무효/공백표를 내 던져 찬성율이 99.95%로 근소하게 떨어졌다.] 일당제 하의 국회의원 선거 역시 결과는 뻔했다.[* 1979년 대통령 선거와 동시에 치러진 의회 선거는 투표율 96.65%로 치러지며 67명의 후보자 명단이 1,250,942명의 투표 중 무려 43,301명을 제외한 나머지가 찬성표를 던져 찬성율이 이전보다 대폭 떨어진 96.35%였고, 1985년 3월 24일에 열린 의회 선거는 78.59%의 투표율을 기록했고, 77석에 단일 정당의 216명의 후보자와 22명의 예비위원이 경쟁했는데도 1,024,533명 중 12,422명을 제외하고는 다 찬성표를 던져 찬성율이 98.8%였다.] 에야데마는 친척과 그의 부족인 카바이족 지지자들이 장악한 충성스러운 군대, 프랑스 등 외국의 풍부한 지원[* 에야데마 시기의 토고는 [[샤를 드 골]]로부터 [[자크 시라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프랑스 대통령으로부터 '프랑스의 대아프리카 정책의 선봉이자 하위 지역에서 프랑스의 이익을 지켜내는 보루'로 여겨지며 풍부한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특히 에야데마는 시라크 대통령을 '개인적인 친구'라고 불렀을 정도로 절친한 관계였다.], 자기 일족을 요직에 앉힘,[* 실제로 그의 사촌은 경찰 학교의 교장이었고, 그의 이복형은 대통령 경호 사령관에 올랐다.] 국가의 빈약한 경제 자원에 대한 접근을 영리하게 차단, 대규모 억압은 하지 않으면서 교묘하게 음모를 꾸면서 정적을 숙청하는 식으로 토고를 경찰 국가로 만드는 등의 수법을 이용해 장기집권을 할 수 있었다. [[1972년]]에는 [[나이지리아]]의 [[야쿠부 고원]][* 참고로 에야데마는 고원이 일으킨 [[나이지리아 내전]] 동안 [[비아프라]]를 인정했고, 나이지리아와 [[코트디부아르]] 사이의 격렬한 갈등을 해결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대통령과 회담하여 [[서아프리카경제공동체]](ECOWAS)의 설립을 추진해 1975~1978년에 초대 의장이 되었고, 이후에도 1980~1981, 1999년에 2차례 더 의장직을 역임한다. [[1974년]] 1월 24일에 에야데마와 그의 정치적, 군사적 측근 3명, 조종사 1명을 태운 [[C-47]] 기체가 토고 북부 사라카와 마을 근처 수풀 한가운데에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했는데,[* 오늘날 사고 현장 근처에는 이 사고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한 기념비가 들어서 있다.] 다른 탑승객들은 모두 사망했지만 에야데마 1명만 홀로, 그것도 상처도 입지 않고 살아남았기에 에야데마는 이 생존을 '신비한 힘'의 덕으로 돌리고 1월 24일을 '경제 해방의 날'[* 이 날은 국가적으로는 '토고의 경제적 독립을 위한 투쟁에서 목숨을 잃은 국가의 아버지와 모든 동포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날'로 간주되었다.]로 선언한 후 이날을 기억하기 위해 자신의 이름도 '에티엔'에서 자기 일족의 언어인 카비아어로 '용기'를 의미하는 '냐싱베'로 개명하고는 이와 동시에 국민들에게 아프리카식 이름으로 개명할 것을 권유했다. 거기에 에야데마는 자신에 대한 비판을 전혀 용납하지 않았기에 토고를 방문하는 외국인 관광객들까지 [[막걸리 보안법|식당에서 에야데마의 이름을 말하지 말라는 주의를 받을 정도였다.]] 에야데마는 이 사고가 단순한 사고가 아닌, 이 사고 2주일 전에 자신이 나라에 있어서 중요한 인산염 광산 회사를 국유화해 더 이상 프랑스 자본이 광석을 착취할 수 없게 된 것을 마음에 안 들어한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이 꾸민 사고라고 주장했지만, 이 사고로부터 거의 5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이 추락사고의 명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사실 그의 측근들이 사고를 조사하며 이 사고의 원인이 기체 결함이라고 발표하자 에야데마는 이를 '이 기체 결함은 분명히 (프랑스측의) [[사보타주]]일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참고로 이 사고 후에 대통령 전용기는 [[걸프스트림(기업)|걸프스트림 II]]로 교체되었으나, 이 기체도 동년 12월 26일에 충돌 사고로 승무원 3명이 사망하는 사고를 겪었다. 참고로 사고기에 탑승한 승객 3명은 전원 생존했으며, 이들 중 에야데마는 없었다.] 참고로 후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 사고로 생존한 사람은 에야데마 1명만이 아니었는데, 에야데마의 친구이자 이 사고기의 동승자였던 프랑수아 루(François Roux) 목사는 적어도 [[2013년]]에도 생존해 있었다. [[https://archive.md/20130418141335/http://www.presidencetogo.tg/index.php?option=com_content&task=view&id=355&Itemid=32#selection-477.0-503.167|#]] 즉, 에야데마가 자신을 신격화하기 위해 사고기 탑승자 수까지 6명에서 5명으로 축소해가며 사고 정보를 일부러 잘못 전달한 셈이다. 여하튼 이렇게 국유화된 인산염 광산 회사는 수익성이 좋아서 성공적인 성과를 거두어 국가 개발을 위한 세입을 증가시켰고, 주변국과 비교하면 정치 상황도 안정적이었기에 1970년대에 토고는 상당히 성장세를[* 실제로 독립 직후인 1960년에는 73달러, 1970년에 116달러도 되지 않던 토고의 1인당 GDP는 1980년에 400달러로 정점을 맞았다.] 달리며 언젠가는 '서아프리카의 [[스위스]]'가 될 것이라는 기대도 얻었으나 1980년대에 정부의 잘못된 관리와 막대한 [[부정부패]] 때문에 토고의 경제사정은 악화되었다.[* 실제로 1984년에 토고의 1인당 GDP는 단 4년 만에 222달러로 떨어졋고, 이후에도 토고의 경제는 성장과 폭락을 거듭하며 그가 사망한 2005년 시점에는 1인당 GDP가 399달러를 기록하게 된다. 물론 화폐 가치 변동을 고려하면 실질 경제 수준은 오히려 추락한 셈이다.] 1980년에는 [[워싱턴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독재에 대해 "개를 죽이려는 사람은 먼저 개가 분노했다고 비난한다. 토고는 번영하고 생존할 수 있으며 우리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우리를 부러워한다." "나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올림피오의 자식들이다." "나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토고에 없다."[* 실제로 에야데마는 토고 인구의 80%를 차지하던 소작농들에게 인기가 많았으나 소수의 교육받은 엘리트들에게는 인기가 없었다고 하고, 이런 인기 덕에 외부에서는 "만약 자유 선거가 있었다면 에야데마는 대다수의 표를 차지했을 것"이라는 말도 있었다.] "내가 그런 억압적인 정권을 이끌고 있었다면 왜 그들(에야데마의 반대파들)은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해 국민들에게 가지 않고 용병들에게 가는가?"[* 실제로 에야데마는 1977년에 토고 망명자들이 [[용병]]을 동원해 자신을 전복시키려 한다는 것을 ([[영국 비밀정보국]]으로부터 전해들은) 미국 대사로부터 전해들었고, 이 계획은 실행조차 되지 않았다.]라고 전면 부인한 바가 있다. [[https://www.washingtonpost.com/archive/politics/1980/06/15/togos-ruler-aims-to-create-the-switzerland-of-africa/a20b58dc-3c55-4fc7-b0af-a0fcb5067a68/|#]]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